바흐와 함께 사순절을 묵상한다는 것: 글렌 굴드와 안드라스 쉬프의 음악 속으로
바흐를 통한 사순절의 묵상(Lenten devotion through Bach)이 가장 깊게 울려 퍼지는 곳은 어디일까요? 웅장한 성당의 높은 천장이 아니라, 어쩌면 1955년 어느 녹음실의 건조하고 정적인 공기 속일지도 모릅니다. 글렌 굴드의 데뷔 앨범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에는 묘한 현상이 하나 있어요. 연주자와 보이지 않는 청중 사이의 비율이 엄격하게 1:1로 느껴진다는 점이죠. 사실 우리의 영성 생활은 종종 너무 북적거리는 ‘가로축’ 때문에 병들곤 합니다. 타인의 시선, 동료들의 평판,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건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니까요. 우리는 자신의 종교적 의례를 마치 공적인 전시회처럼 다루곤 하죠. 세상을 버리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세상으로부터 ‘참회 잘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꼴입니다. 굴드는 의도치 않게 이런 현대적인 병폐에 아주 근사한 처방전을 내립니다. 굴드가 연주할 때, 그는 우리를 위해 연주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이라는 비밀스러운 실험실 안에 머물 뿐이죠. 연주 중간중간 들리는 그 특유의 콧노래—정교한 음악의 기하학적 구조를 파고드는 그 지저분하고 인간적인 숨소리—는 그가 대상과 너무나 깊게 얽혀 있어서 나머지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상태의 소리입니다.
작가로 바흐의 음악은 우리에게 사순절의 깊은 묵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게 하며, 그 안에서 고독한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굴드와 쉬프는 이러한 음악적 여정을 통해 신성과 인간사의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영적 체험을 선사합니다. 이 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 바흐와 함께하는 고독의 순간은, 우리에게 더욱 깊은 신앙의 통찰을 제공합니다. 목회 활동하며 자주 느낀 건데, 위대한 예술은 결코 구걸하지 않아요. 제발 봐달라고 애원하지 않죠.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성 속에 머뭅니다. 바흐의 음악은 그 어떤 음악보다도 이런 구조적 정직함을 요구해요. 이 음악은 무엇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엇’입니다. 우리의 감상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수학적이고 신학적인 명제들이죠. 바흐를 통한 사순절의 묵상 속에서, 우리는 골방 기도의 거울을 발견합니다. 굴드처럼 우리도 ‘신성한 대위법(Divine Counterpoint: 여러 선율이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작법)’에 완전히 몰입해, 다른 이의 존재조차 잊어버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 삶에서 고군분투의 흔적인 ‘콧노래’가 새어 나온다면, 그건 우리가 ‘근원’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찾는 자와 찾아진 자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일 거예요. 이것이 바로 광야의 구조적 논리입니다. 본질적인 대화만 남을 때까지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는 과정 말이죠.
글렌 굴드의 비밀 실험실이 보여주는 구조적 논리
굴드의 바흐를 이해한다는 건 감상주의와 구조의 차이를 깨닫는 일입니다. 전후 시대의 바흐 연주 스타일은 이른바 ‘스토코프스키화(Stokowski-fication)’에 치우쳐 있었어요. 대위법의 명료한 선을 뭉개버리고 모호하고 감정적인 울림만을 강조하는 화려한 오케스트라식 감상주의였죠. 하지만 1955년 굴드의 등장은 일종의 ‘건축적 복원’이었습니다. 그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단순히 예쁘장한 소품집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집요하고 엄격하게 파고드는 통합된 탐구로 다뤘습니다. 이것이 바흐를 통한 사순절의 묵상의 핵심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이란 새로운 경험을 자꾸 쌓아가는 게 아니라, 이미 세워진 진리의 무한한 깊이를 탐험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죠.
굴드의 고립은 단순히 심리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추구한 명료함을 얻기 위한 물리적 요구 사항이었죠. 스튜디오로 숨어듦으로써 그는 공연장의 ‘소음’—기침 소리, 박수 소리, 연주자를 키치(Kitsch: 저속하거나 가짜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로 유혹하는 청중의 에너지—을 제거했습니다. 1:1의 비율 안에서 연주자는 오직 악보와 창조주에게만 책임을 집니다. 이는 예배의 본질에 대해 깊은 사순절적 교훈을 줍니다. 내면의 고독을 위해 필요한 구조적 요건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 시선의 포기: 사회적 승인이라는 ‘가로축’의 청중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 잔여물의 수용: 우리의 ‘콧노래’—즉 인간적인 불완전함—가 신성함에 가까이 다가갈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부산물임을 이해하는 것.
- 정신의 정밀함: 우리 신앙의 ‘아리아(Aria)’를 몽상가의 막연함이 아니라 장인의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
- 실험실의 마음가짐: 사순절을 통제된 사적인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정제하는 시기로 여기는 것.
굴드 식의 고독을 우리의 영적 훈련에 적용할 때, 우리는 핑계라는 이름의 ‘페달’을 서서히 떼게 됩니다. 더 이상 울려 퍼지는 잔향 속에 실수를 숨기지 않게 되죠. 모든 음표와 모든 행동이 전체 구조 안에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 대위법의 냉철한 빛 아래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라스 쉬프 경과 ‘서스테인 페달의 금식’
글렌 굴드가 바흐를 통한 사순절의 묵상에서 내면의 고독을 상징한다면, 안드라스 쉬프(Sir András Schiff) 경은 순결을 향한 외적 절제를 보여줍니다. 몇 년 전, 라이프치히 바흐 페스티벌에서 가족과 함께 앉아 있을 때였어요. 쉬프가 특유의 리드미컬하고 목적 있는 발걸음으로 피아노를 향해 걸어 나오더군요. 그는 단순히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연속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했습니다. 바흐가 칸토르로 봉직했던 성 토마스 교회(Thomaskirche)는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음향을 선사합니다.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그 어떤 ‘모호함’도 허용되지 않는 곳이죠. 이 공연에서 쉬프의 가장 놀라운 점은 서스테인 페달(Sustaining Pedal: 음을 길게 늘여주는 피아노 페달)을 밟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