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의 울림: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 투영된 십자가
뼛속 깊이 스며든 불협화음
침묵이 마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 뒤에 찾아오는 침묵, 청천벽력 같은 진단 결과 뒤의 정적, 혹은 지난 10년 동안 정성껏 닦아온 우상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혈관에 피 한 방울 돌지 않는 가짜였음을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 같은 것 말입니다. 우리는 불협화음 속에 살아갑니다. 타락한 세상이라는 단조의 선율 속에서 깨어난 우리는, 혼돈을 이해해 보려 애써 노래를 흥얼거리지만 목소리는 자꾸만 갈라집니다. 우리는 해결을 갈망합니다. 문장 끝에 찍히는 명쾌한 “예”라는 답을 원하지만, 대개는 쉼표에 갇힌 채 마침표가 과연 찍히기는 할지 의문을 품으며 살아갑니다.
한때 제 마음이 마치 현의 절반이 끊어진 피아노처럼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비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루해하던 부분뿐만 아니라, 제 정체성처럼 여길 만큼 너무나 사랑했던 부분까지도 원하시는 하나님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토록 무서울 정도로 정교하시면서도 한없이 자애로우실 수 있는지 설명할 언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발을 쓰고 쉬지 않고 펜을 움직였던 18세기의 한 독일인에게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단순한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계하는 건축가였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려면 단순히 예쁜 화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영광을 논하기 전에 고통의 날카로운 단면을 인정하는 특별한 종류의 화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의 대작인 <마태 수난곡(St. Matthew Passion)>에서 바흐는 세상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그 신음 소리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제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예언적 수학: 대위법에 담긴 하나님의 정교함
우리는 흔히 예술을 감정의 영역이라 생각하지만, 바흐는 그것이 사실(fact)의 영역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가진 ‘예언적’ 명료함을 거울처럼 비추는 수학적 무게감이 실려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의 데이터를 살펴보십시오. 3시간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구조물은 시계 제조공과 같은 정밀함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바흐는 ‘대위법(counterpoint)’이라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선율들을 결합하여 리듬과 윤곽은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연주될 때는 조화를 이루게 하는 예술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악적 기교가 아니라 신학적 선포입니다. 대위법 안에서는 여러 목소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때로는 충돌하거나 멀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의 주권적인 논리 안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 28절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들—슬픔, 유혹, 숨겨진 죄, 그리고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빛의 순간들—은 제각기 흩어져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 독립된 선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거장의 손길 아래,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복합적이고 웅장한 해결을 향해 엮여 들어갑니다.
바흐의 정교함은 우리가 처한 혼돈을 꾸짖는 듯합니다. 그의 삶은 죽음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었고, 첫 아내와 사별했으며, 스무 명의 자녀 중 열한 명을 먼저 보냈습니다. 누군가 엉망진창이고 불협화음 가득한 인생 이야기를 쓸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바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악보 끝에 항상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우리 삶의 형편이 마이너스처럼 보일 때조차 하나님의 수학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음악의 지성은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푸가(fugue)의 모든 음표에 목적이 있듯이, 광야에서의 모든 날에도 목적지가 있는 법입니다.
제사장적 선율: ‘수난 찬송’의 무게감
하지만 공감 없는 정교함은 기계에 불과합니다. 바흐는 기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악보의 오선지 사이로 피를 흘리는 듯한 ‘제사장적’ 공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정서적 중력의 중심에는 우리에게 ‘오 거룩하신 주님(O Sacred Head, Now Wounded)’으로 잘 알려진 ‘수난 찬송(Passion Chorale)’이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바흐는 이 선율을 단 한 번 연주하고 지나치지 않습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 다섯 번이나 이 선율을 엮어 넣습니다. 여기서 천재성이 드러납니다. 선율이 등장할 때마다 화성(harmonization)이 바뀝니다. 멜로디는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주변의 정서적 분위기는 십자가를 대하는 영혼의 반응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 첫 번째는 주님을 알아보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 중반부에 이르면 그것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참회가 됩니다.
-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고요하고도 잊을 수 없는 전적인 항복이 됩니다.
바흐는 예술의 ‘제사장적’ 기능을 사용하여 우리를 희생의 현장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는 당신을 구경꾼으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성가대가 “벌을 받아야 할 자는 바로 나입니다”라고 노래할 때, 음악은 우리의 죄가 곧 망치와 못이었음을 심령이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 사무치는 선율들은 우리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성의 단조(minor key)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신 구세주의 공감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우리 반역의 불협화음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우리를 다시 아버지와 화목(harmonize)하게 하셨습니다.
왕적인 해결: 무덤을 이긴 승리
만약 바흐가 그리스도의 장사 지냄으로 곡을 끝냈다면, 그는 위대한 예술가일지는 몰라도 부족한 신학자였을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마치 무덤의 돌문이 굴러 들어가는 듯한 거대한 소리의 벽인 이중 합창으로 끝을 맺습니다. 무겁고도 엄숙합니다. 하지만 바흐의 전 생애 작품 구조 안에서, 그리고 이 수난곡의 마지막 종지 안에서도, 승리를 집행하시는 ‘왕’의 모습이 서려 있습니다.
음악 이론에는 ‘피카르디 3도(Picardy Third)’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곡 전체가 단조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장화음으로 끝맺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체계에 가해지는 충격입니다. “아니오”라고 예상했던 곳에 울려 퍼지는 강력한 “예”입니다. 바흐가 모든 악장 끝에 문자 그대로의 피카르디 3도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 철학 전체는 긴장에서 해소로 나아가는 움직임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가진 영적인 힘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비극이 아니라 ‘대속의 거래’였음을 보여줍니다. 왕은 십자가 나무 위에 계실 때조차 보좌 위에 계셨습니다. 마지막 해결은 단순한 아름다운 결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덤에 대한 완전한 승리입니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선율들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고, 대위법은 안식에 이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예”가 죽음의 “아니오”를 집어삼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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